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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서
    독후감 2019. 3. 9. 20:35





    자살을 용기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삶도 용기만 있다고 해서 마냥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삶의 그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다.


    유전자의 영생은 생물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 철학적 가치는 없다. 유전자는 기억하지 않으며 사유하지 않는다. 유전자가 영생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나’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주체, 지성을 가진 자아는 언제나 단 한 번만 존재한다. 유전자는 유전자일 뿐 ‘나’가 아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영원한 이별에 대한 상상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색깔과 맛을 확인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럴 때 사랑은 싹 난 감자처럼 아린 맛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와의 영원한 작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리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깊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려면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식은 부모의 꿈이나 희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자신의 소망을 자녀에게 투사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옳다고 믿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강제해서도 안 된다. 자녀들은 부모가 그렇게 할 경우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


    사람의 경쟁력은 인지적,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

    많은 부모들이 인지적 능력을 기르는 데 아이를 밀어넣음으로써 아이들이 행복을 느낄 능력을 제약한다. 인지능력만 키우느라 정신적, 정서적 능력의 성장을 저해하고 신체적 건강을 해친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아이일수록 더 쉽게 인터넷 게임이나 술, 폭력 등에 빠져든다. 삶의 의미와 기쁨을 모르기에 스트레스에 짓눌려 자살을 생각하고 시도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이 필요하다. 모두가 예전의 상황에 맞는 익숙한 생각과 행동만 한다면 개체뿐만 아니라 집단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절멸할 수 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은 인간의 일반 지능을 진화시켰다. 이것이 일반 지능의 발전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다.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tolerance을 갖추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신념은 삶을 풍요롭고 기쁘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이념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삶은 공평해야 한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룰 수 없는 소망이다. 삶은 공평하지 않으며 세상에는 부조리가 널려 있다.


    삶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삶은 그저 조금 더 길기만 할 뿐 하루살이의 삶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내 책임이든 사회의 책임이든, 닥쳐온 고통은 일단 내가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세상을 원망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다. 누구도 그 짐을 대신 져주지 않는다.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카뮈는 물었다. 그냥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는 이유를 찾으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 하루 그 의미를 충족하는 삶을 살았는지 판단해야 한다. 정답은 없다. 우리는 각자 정체성이 다른 자아自我들이다. 누구도 타인에게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대신 결정해줄 수 없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 우리는 조금씩 죽어 간다. 죽음은 단지 삶의 이면裏面일 뿐이다.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며 함께 완성된다. 쉰다섯 해를 산 나는 이미 쉰다섯 해 죽은 것이다.


    괴물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훌륭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되든, 무엇을 이루든, ‘자기 결정권’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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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나라는 존재가 그저 유전자를 전달하는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에 허무함을 느꼈다. 크게 보면 인간의 삶은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것일 뿐일진데 내가 학교를 가고 회사를 가기 위하여 아둥바둥하는게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지만 이 책에서 철학적으로는 '나'라는 존재가 단 한 번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고, 내 삶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하나밖에 없는 나의 인생을 잘 살아내고, 내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일단...나는 왜 20대 중반이 되었어도, 내 삶의 방향을 모르는 걸까?

    나는 초등학생 때 부터 많은 학원을 다녔고, 고등학생때는 기숙 학교에 진학해 밤 12시까지 야자를 하고 새벽 6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가족들이 제안하는 과로, 성적에 맞추어 진학했다. 인생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결정마저 내 스스로 하지 않은 것이다.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내 정서적인 능력은 많이 부족했다. 스스로 생각해본 적 없는, 시키는대로 공부만 하며 자란 내가 정서적인 능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었겠나? 나는 남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정신적 성장판은 늦게 닫히는 편이었는지 대학 생활을 하며 많은 부분 성장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나의 삶'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하며 나만의 삶의 의미, 소중한 가치들을 찾아가고 싶다. 



         또.. 어떻게 살아야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사람들이 말하길 내일 당장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한단다. 근데 현실적으로 그건 어렵다. 그렇게 못할 이유는 많다. 부모님의 기대를 져버리기 힘들어서, 학력이 아까워서, 내 자존심이 서지 않아서 등등...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자유의지를 내세우는 게 쉬운 줄 아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나만을 위해서 산다면 사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못 할 이유는 사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한 변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라는 존재가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고 방식 자체를 깨버릴 필요성이 있다. 

    한계를 정해두지 않고 나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다.



    으아 책을 재밌게 읽긴 했는데

    너무 많은게 담긴 책이기도 하고 느낀 점도 많아서 정리하기가 참 힘들었다.

    그래도 읽는동안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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